프랑스 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순간
프랑스 요리하면 어떤 게 떠오르시나요? 와인, 바게트, 그리고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신선한 ‘굴’ 아닐까요? 그런데 한때 이 프랑스 굴이 식탁에서 영영 사라질 뻔한 아찔한 위기를 겪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때는 1960년대 중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프랑스 해안을 가득 메웠던 토종 굴, 특히 포르투갈 굴(Crassostrea angulata)과 유럽 편평 굴(Ostrea edulis)이 바이러스성 질병 등 원인 모를 질병으로 속수무책 폐사하기 시작했어요. 마치 전염병처럼 번진 이 재앙은 생산지별로40~70%, 심지어 일부 지역에서는 90% 이상 양식장을 초토화시켰고, 포르투갈산 굴뿐만 아니라 유럽 토착종인 히라가키(plate oyster, Ostrea edulis)도 같은 시기 여러 질병(특히 마르텔리아, 보나미아라는 기생성 질병)으로 대량 죽어가 한때 유럽 굴 생산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던 프랑스 굴 산업은 그야말로 궤멸 직전에 놓였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국민 음식’이나 다름없던 굴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니, 프랑스인들의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죠. 심지어 나폴레옹도 삼시세끼 굴을 즐겨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굴 사랑은 유별났으니까요. 이 위기는 1970년대 초까지 이어지며 프랑스 전체를 암울하게 만들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온 희망, 미야기 참굴의 대장정
이 치명적인 위기 상황에서 프랑스 양식업계와 정부는 세계 각국에서 병에 강한 새 굴 종자를 찾기 위해 다양한 실험과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마땅한 대체종을 찾을 수 없었죠. 절망의 늪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 한 줄기 빛이 찾아온 건, 바로 바다 건너 일본에서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미 각종 질병에 강한 저항력을 가진 ‘참굴(Crassostrea gigas, 일본명 마가키)’ 양식에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정부와 양식업계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일본에 간절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화답한 것이 바로 일본의 미야기현을 비롯한 태평양 연안의 굴 양식가들이었습니다.
1966년을 전후해 소규모의 시험적 도입이 실시된 이후 1971년부터 1975년 사이, 수백만 개가 넘는 어린 참굴, 즉 ‘치패(spat)’가 일본에서 프랑스로 공수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는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를 통해 어미 굴(broodstock) 형태로 도입되기도 했죠. '오페라시옹 레쥬르(Resur, '부활' 작전)'라는 특명 하에 프랑스 정부와 유통업체, 현지 양식인까지 가담한 이 대장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온도와 환경에 민감한 어린 굴들을 살아서 프랑스까지 옮기는 것은 당시 기술로는 엄청난 도전이었죠. 하지만 양국 전문가들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에 일본 참굴은 프랑스 해안에 무사히 도착했고, 놀라운 생명력으로 새로운 환경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습니다. 일본 현지의 신속한 협조와 뒤이은 엄격한 위생/검역 덕분에 마치 구원투수처럼 등장한 참굴은 프랑스 해역에 빠르게 적응하여 번식력을 발휘했고, 1970년대 후반에는 기존 포르투갈굴과 유럽산 굴을 거의 완전히 대체해 프랑스 굴 산업에 새로운 희망을 불어넣었습니다. 일본산 참굴은 질병에 강했을 뿐만 아니라 성장 속도도 빨라, 프랑스 양식업자들에게 큰 기쁨을 안겨주었죠. 미야기현에서 온 작은 생명들이 프랑스 식탁을 구원하는 위대한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두 나라를 잇는 굴, 끝나지 않은 우정 이야기
결과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습니다! 일본에서 건너온 참굴들은 프랑스 바다에 완벽하게 정착했고, 덕분에 프랑스의 굴 생산량은 극적으로 회복되기 시작했습니다. 1976년에는 프랑스의 일본굴 생산량이 80,000톤에 달했으며,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전 해안에서 양식되는 굴의 절대다수가 일본산 종자에서 유래한 참굴이 되었습니다. 이후 기존의 토착종(히라가키)은 프랑스 전체 생산량의 1~2% 이하로 축소되어 "고급/희소" 브랜드로만 존재하게 되었고, 2020년대 현재까지 프랑스 굴 시장의 90~99%가 일본산 참굴(Crassostrea gigas)의 후손에 해당합니다. 수치적으로는 2020년대 기준 프랑스 전체 굴 생산량 약 13만 톤 중 98% 내외가 일본 종자 유래의 참굴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칸칼레" 등 브르타뉴 굴 양식장의 90% 이상, 아르카숑 만과 마렌-올레롱 등 주요 산지 모두 일본유래굴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프랑스에서 맛보는 굴의 대부분이 바로 이때 일본에서 온 참굴의 후예들이라는 사실, 정말 놀랍지 않나요? 이 사건은 단순히 한 나라의 산업을 살린 것을 넘어, 일본과 프랑스 사이에 아주 특별한 우정을 쌓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2011년, 일본 동북부 지역에 대지진과 쓰나미가 발생하여 미야기현을 포함한 많은 굴 양식장이 파괴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때 프랑스는 과거 일본이 베풀었던 도움을 잊지 않고 ‘프랑스 오카에시(보답)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지원에 나섰습니다. 프랑스의 저명한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 등이 주도하여 모금 운동을 펼쳤고, 모인 성금은 미야기현 굴 양식 산업 재건에 소중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심지어 쓰나미 직전, 미야기현에서 프랑스 국립해양연구소(IFREMER)로 5000개의 어미 굴을 보낼 계획이 있었으나 안타깝게 무산된 일도 있었다고 하니, 두 나라의 굴을 통한 인연은 정말 깊다고 할 수 있겠죠.
최근에는 일본 히로시마산 굴이 프랑스 시장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등, 굴을 매개로 한 양국의 교류는 여전히 활발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때 절멸 위기에 처했던 프랑스 굴이 일본의 도움으로 화려하게 부활하고, 수십 년이 지나 그 은혜를 다시 되갚는 이야기는 국경을 초월한 협력과 우정의 가치를 되새기게 합니다. 다음에 프랑스에서 굴을 맛볼 기회가 생긴다면, 이 흥미진진한 역사를 한번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요약
-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 프랑스는 토종 굴(포르투갈 굴, 유럽 편평 굴)의 대량 폐사로 심각한 굴 산업 위기를 겪었습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질병에 강한 일본 미야기현의 참굴(Crassostrea gigas) 치패와 어미 굴이 프랑스로 대량 도입되었습니다. - 일본 참굴은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프랑스 굴 산업을 부흥시켰고, 현재 프랑스 굴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프랑스는 과거의 도움에 보답하고자 ‘프랑스 오카에시 프로젝트’를 통해 일본 굴 양식 산업 재건을 지원했습니다.
- 굴을 통해 맺어진 양국의 특별한 인연과 우정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